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게이 코롤료프 (문단 편집) == 소련 우주개발에 대한 기여 == [[베르너 폰 브라운]]과는 두고두고 비교 대상이 되는 관계다. 폰 브라운은 이미 생전에도 그 존재가 잘 알려졌던 유명인사지만, 코롤료프는 죽어서야 비로소 존재와 이름이 공개되었다는 점에서도 둘은 매우 대조적이다.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개발한 소련의 기술이 [[나치 독일]]의 기술을 그대로 복제했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개발자급 대부분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에 투항하여 헬무트 그뢰트룹을 빼면 V2 주요 개발진은 거의 영입을 못했고 베르너 폰 브라운도 소련 투항자들이 별 볼 일 없는 단순 제조직공들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소련이 우주개발에서 진전을 보이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코롤료프를 비롯한 소련의 로켓기술자들이 로켓기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었다면, 이런 시제품을 가지고도 단순카피에 그쳤을 것인데, 코롤료프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몇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V-2의 복제형인 R-1, R-2 같은 경우는 엔진 하나만 쓰였는데, 소련의 고유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R-7은 여러 엔진을 묶는 클러스터링 기술이 쓰였고 이는 코롤료프가 전쟁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R-7이 궤도에 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가 83kg인데 반해서, 폰 브라운이 개발한 레드스톤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익스플로러는 겨우 14kg이었다. 미국은 [[베르너 폰 브라운]] 한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로켓 설계를 해 나간데 반해 소련에는 코롤료프,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발렌틴 글루시코]], [[미하일 얀겔]] 등의 걸출한 로켓 개발자가 넷이나 되었고 소련 당국이 이들의 교통정리를 못한 것이 달 탐사 경쟁에서 소련이 미국에 밀린 이유 중 하나였을 정도다. 코롤료프 사후에도 첼로메이와 얀겔은 서로 자신이 개발한 로켓을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으로 제식 채용해 달라고 싸웠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아래에 나온 므스티슬라프 켈디시가 나섰으나 두 사람이 만든 로켓이 모두 고성능인지라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모두 제식 채용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중복 투자는 소련 국방예산에 큰 부담을 지워주는 결과가 되었다. 처음에는 미국도 이렇게 여러군데서 로켓개발을 하다가 실패를 거듭했던 바 있다. 특히 미공군 등에서 폰 브라운의 나치 전력을 문제 삼아 견제를 일삼았다. 하지만 이후 소련이 스푸트니크 등의 성과를 연달아 올리는 것에 충격을 받은 아이젠하워가 우주 개발 역량, 인력을 새로 출범한 NASA에 집중시켰고, 이후에는 소련을 역전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보다 돈도 많은 데다가 세계 각지에서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고, [[재료공학]][* 재료공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미국에서 탄생했다.] 이나 [[전자공학]][* 특히 1950년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사의 [[잭 킬비]]가 발명한 반도체는 미국의 우주개발 및 ICBM의 발달에 획기적 기여를 했고, 이 때문에 미국의 우주선이나 로켓들은 소련보다 훨씬 더 정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도체도 처음에는 매우 고가였지만, 미국은 로켓, 미사일, 무기용 반도체를 값싸게 공급받기 위해 1960-70년대 [[인텔]]이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 엄청난 보조금을 주었고, 이들은 보조금을 받으며 기술개발에 매진해 반도체 가격은 엄청나게 떨어졌다. 그 부산물로 1970년대 말부터 개인용 컴퓨터 산업이 발달하게 되어 현재의 정보화 시대가 도래했다. 현재의 인터넷 시대도 냉전 및 우주경쟁의 또다른 부산물이라고 할수 있다.] 같은 관련 기술이 소련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이렇게 소련이 갖지 못한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주개발 경쟁은 태생적으로 미국이 유리했다. 오히려 소련은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인구의 1/10이 학살된 처참한 처지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된 1950년대 (2차대전 당시 거의 피해가 없던) 미국을 앞서 나갔고, 여러가지 관련 기술이 뒤떨어졌음에도 이러한 점들을 코롤료프 등 소수 개발자들의 역량으로 우주기술에서 미국과 선두다툼을 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불리함을 오직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극복한 이가 바로 코롤료프이기 때문에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아도 모자람이 없다. [[파일:attachment/Korolev_Kurchatov_Keldysh.jpg|width=500]] 소련 과학계의 삼거두. 왼쪽부터 코롤료프, 가운데는 [[소련의 핵개발]]을 주도한 이고르 쿠르차토프, 맨 오른쪽은 [[로켓]]과 [[핵무기]]의 물리-수학적 이론적 계산을 도맡았던 므스티슬라프 켈디시.[* 응용수학자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주로 우주개발에 관련된 문제를 연구했기 때문에 수학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하여 소련의 대표적 수학자로는 이분보다는 위에서 언급된 콜모고로프가 꼽힌다.] 소련 우주개발 계획에서의 중요성과 미국이 보내는 암살자 위협으로부터의 과잉보호 때문에 모든 신상정보와 역할은 극비기밀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수석 설계자'(Chief Designer)로만 간간히 언급되었고, 사후에야 존재가 공개되었다. 성대한 장례식 후에 소련의 국가영웅들만 모셔지는 [[붉은 광장]]의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다. 당시 서방에는 그의 존재가 거의 안 알려져 있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남다른 과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여러 과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성공적으로 조율하는 리더십, 그리고 우주개발에 회의적인 정치가들을 설득하여 거액의 국고를 끌어 올 수 있는 특별한 정치력까지 갖추어 소련의 우주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이 세가지 능력 중 하나만 없었어도 소련의 우주개발 능력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소련 과학기술사에서 이론물리학의 [[레프 란다우]], 수학의 안드레이 콜모고로프, 므스티슬라프 켈디쉬, 핵물리학의 이고르 쿠르차토프[* 소련 핵물리학의 레전드로는 [[체렌코프 현상]]을 규명하고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파벨 체렌코프]], [[일리야 프랑크]], [[이고르 탐]]이나 원폭의 아버지 [[이고르 쿠르차토프]], [[차르 봄바]]의 아버지 [[율리 하리톤]],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을 들 수 있다. 사하로프의 경우 [[차르 봄바]] 이후 핵무기 개발 회의를 느끼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하고 소련 반체제 운동에 투신하였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노벨평화상]]을 받는 등 인권운동가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등 역사를 풍미한 인물들이 적지 않지만 소련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드높인 공로로 치면 이 사람 앞에서는 모두 한 수 접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전성기 때도 미국의 70% 밖에 안되는 국력을 가졌던 소련이 미국의 라이벌이라고 인식된 것은 군사적인 면도 있겠지만 바로 [[우주경쟁]]의 초반기에 소련이 미국을 한 발자국씩 앞섰기 때문이고, 그것을 이끈 사람이 바로 코롤료프이다. 비록 달착륙 경쟁에서는 그의 사후 [[N1]] 로켓의 거듭된 실패로 미국의 [[아폴로 11호]]에게 밀렸지만,[* N1은 그의 죽음 이후 후계자이자 보좌관이였던 바실리 미신과 쿠즈네초프가 개발하였다.] 그의 이름과 그가 만든 작품들은 인류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새겼으며[* 후술하겠지만 R-7 로켓의 개발, 그리고 이 로켓으로 해낸 모든 일이 세계 최초다!] 그의 위대한 걸작 [[R-7]] 로켓은 21세기에도 수많은 개량형이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러시아의 우주 과학을 견인하는 주력 우주 발사체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여기에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로켓'''의 타이틀도 함께 달고 있다. 로켓 공중폭발 시 승무원 모듈 비상사출장치 등에 개량을 거치면서 더더욱 신뢰성과 안전성이 강해졌다.] 소련의 로켓 개발사 자체가 극비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코롤료프와 소련의 우주 개발사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일급 기밀로 다뤄지다가 계획이 끝나면 모든 자료와 시설이 폐기되는 과정을 거쳤다. 때문에 코롤료프의 업적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한동안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다.~~사실 에네르기아나 하르트론 같은 구소련 시절 탄생한 우주 항공 관련 기관들이 그 시절 자료를 매우 소중히 잘 간직하고 있다... 당장 러시아. 우크라이나 웹을 잘 뒤져보면 그 당시에 쓰였던 로켓엔진이나 전자장비. 소련 유인우주선에 탑재되던 기계식 네비게이션이나 디지털 시계 같은 것도 드물긴 하나 ebay를 통해 구할 수 있다. https://youtu.be/72xymkw230E?si=sEJ_7kyeWfNKSjLh~~ 여기서 간과해서 안될 점은 소련의 로켓 개발은 코롤료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발렌틴 글루시코]],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미하일 얀겔]], 바실리 미신 등 코롤료프 이외에도 여러 뛰어난 로켓 과학자들이 있었다. 특히 글루시코, 첼로메이, 얀겔의 역량은 코롤료프보다 떨어지지 않았지만, 코롤료프가 이들 중 가장 연배가 높았기 때문에 이들보다 먼저 높은 자리에 올랐고, 책임자가 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들이 서로 협력과 경쟁을 반복하며 소련의 로켓 개발을 이루어 온 것인데, 누가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하고 책임을 졌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보니, 그간 서방에서는 모든 로켓 개발을 마치 코롤료프 혼자서 책임지고 해낸 것으로 묘사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첼로메이, 글루시코, 얀겔 등은 주로 군사용 미사일 개발을 맡았기 때문에 주로 우주 개발용 로켓을 만들던 코롤료프가 자연스럽게 소련 우주 개발의 대표격으로 대접받게 된 것. 하지만 로켓과 미사일은 서로 비슷한 구조여서 소련의 로켓 개발은 코롤료프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라 이들 여러 과학자들의 협력과 경쟁으로 이루어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군사적 목적이 고려되지 않은 순수 달착륙 로켓인 N1 로켓 개발 과정에도 초반에 첼로메이와 글루시코가 많이 관여했다. 하지만 이들이 하도 티격태격하자 새로 권력을 잡은 브레즈네프는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된다면서 1965년경에 교통정리를 해서 코롤료프는 우주 궤도 로켓, 첼로메이와 글루시코는 군용 미사일로 명확하게 선을 긋고 서로 간섭하지 않도록 했고 이후로 N1 로켓 개발에서 글루시코와 첼로메이는 배제되었고 코롤료프 혼자서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 글루시코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N1 로켓 개발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코롤료프가 다른 과학자들의 도움없이 독자 개발한 로켓인 N1 로켓은 결국 실패한 반면 얀겔, 첼로메이가 독자적으로 만든 로켓들은 대부분 성공했다. 이들 로켓의 성공에는 글루시코가 개발한 로켓 엔진이 바탕이 되었다. 물론 N1 로켓이 난이도가 높은 로켓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완벽하게 실패했고, 반면 첼로메이와 얀겔은 R-7보다 훨씬 뛰어난 로켓들을 개발했다. R-7은 실전용 ICBM으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실제로 소련이 실전배치한 ICBM은 얀겔, 첼로메이, 글루시코가 개발한 것들이었다. 사실 R-7 역시 코롤료프가 총책임자였지만 글루시코 등 다른 과학자들의 도움이 지대했다. 우주 개발을 다루는 서적이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워낙 소련 내부의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측면 외에도 지루한 로켓 개발 이야기를 독자와 시청자들이 보게 만들기 위해서는 극적인 드라마가 필요했고, 이에 미국과 소련의 로켓 개발을 폰 브라운과 코롤료프의 개인적 경쟁으로 단순화하였다. 미국의 경우에는 자세한 자료도 있고 관련자들이 멀쩡히 다 살아있어 사실과 차이를 두기 어렵지만 관련 자료가 별로 없는 소련의 경우, 어지간한 건 코롤료프가 다 한 것으로 처리하고, 첼로메이나 글루시코 등 다른 과학자들의 존재는 축소되거나, 심지어 주인공인 코롤료프와 대립하고 그를 방해하는 악역화되었다.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련의 로켓 개발은 코롤료프가 다 했다는 인식이 고착화되게 되었다. 그렇게 코롤료프가 신격화되면서 아래에 나오는 것과 같이 폰 브라운을 능가하냐 아니냐와 같은 소모적인 논란이 우주 덕후들 사이에 지속되기도 하기도 했지만 소련 로켓 개발사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들은 오히려 글루시코가 코롤료프보다 뛰어난 천재였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고, 차라리 글루시코가 주도했다면 소련도 달착륙 로켓 개발을 성공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코롤료프보다 먼저 안정성 있는 대형 로켓을 개발한 첼로메이, 얀겔도 만만치 않은 과학자였지만 그들이 개발한 로켓이 군사용이었기 때문에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의견도 있는 등 소련의 로켓 개발 업적이 모두 코롤료프 덕분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정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사정이 있으니, 코롤료프이외의 소련의 우주개발에 공헌한 여러 뛰어난 공학자들이 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코롤료프가 대표적으로 기념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우주개발에서도 폰 브라운만 남고 나머지 인사들은 거의 묻힌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 로켓의 아버지인 로버트 고다드 JPL의 설립자인 시어도어 폰 카르만도 폰 브라운에 묻혀버렸다.] 때문에 소련의 미사일/로켓 개발사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코롤료프가 오히려 얀겔, 첼로메이, 글루시코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오는 것. 이런 평가는 사실 러시아에도 있으며, 코롤료프 설계국의 경쟁사인 첼로메이 설계국 중역 출신이며, 그 자신이 로켓 개발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도 "코롤료프는 개발자라기보다는 관리자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개발자 출신이던 세르게이 흐루쇼프는 코롤료프의 기술적 역량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에는 젬병인 행정관료 출신이지만, NASA국장을 맡아 달착륙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제임스 에드윈 웹]]에서 보듯이 기술팀을 조율하고 예산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거대 프로젝트 전체를 감독하는 프로젝트 관리자의 역량은 개발자만큼이나 중요하고 설령 코롤료프의 개발자로서의 역량이 알져진 것만큼 특출하지 않다고 해도 이것이 프로젝트 관리자를 맡아 세계 최초를 여러번 달성한 코롤료프의 대업적을 퇴색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기업가이고 개발자나 전공자 출신은 아니었지만 기술적 트렌드를 이해하고 이를 혁신으로 진화시킨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도 마찬가지 역량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애플이나 테슬라에서 이 둘의 리더쉽이나 관리 역량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바로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소련의 후계국인 러시아와 코롤료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는 그를 냉전기 [[우주경쟁]]에 참가했던 소련의 대표주자로 기념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